Les Impensés de l’infantile (kr)

유년 시절 지나친 것들

“I long to see your face (당신의 표정이 궁금해요) – 이환희, 박미선” 전시에 관하여
(서울, 2020년 5월)


본 전시가 열어주는 정신적, 감정적 공간은 한결같이 같은 질문으로 귀결된다. 재료의 선택, 사용과 같은 기법상의 특성이나 볼거리(spectacle 스펙타클)로써 제시된 부분을 넘어서, 우리의 감각에 호소하는 모순적인 흐름 안에서 무엇을 느낄 수 있는가. 이는 단순히 “보는 것”과 관련된 것인가? 적당히 시선을 두는 것, 그리고 그것에서 잉여 향락(plus-de-jouir, Lacan)을 도출해내는 것과 관계되는가? 원색적이거나 두려움의 대상인 정동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것인가? 이 전시의 여정은 유동적이고, 결국에는 늘 하나의 개별적인 산책이 된다. 그 때, 우리가 논의할 것은 무의식적 선택들과 침묵의 지점들이 아닐까?

꽃에 둘러싸인 젊은 여성들은 무엇에 대해 꿈꾸는가?


내면의 시나리오 속, 미묘한 대립이 펼쳐진다. 부드러움, 관능, 몸에서 일어나는 첫번째 개화와 실현 사이에서. (이러한 실현은 끊임없이 생명력을 부여하는 환상의 각본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욕망과 결합하는 이 충동적 과잉은 태생적으로 자신의 뿌리를 찾는다. 그리고 주체는 일반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어떻게 타자의 욕망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것인가?
모성의 상징들(attributs), 모성경쟁에서 그토록 많은 질투와 죽음을 소망하게 하는 “독점적 (privatif)” 젖가슴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1]

[1]     Attack a nipple (Miseon Park), 2019, 25 x 10 cm, acrylic on paper

몸을 버려야 하는가, 그로부터 분리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동요하고, 달리고, 수영하고, 물에 뛰어들고, 날아야 하나? 그것을 조각 내고, 절단하여 팔아치우는 것은? [2]?

우리의 근대성이 찬양하는 자기 성애적인 고독의 매개체, 상품화된 대상을 우리의 몸에 덧붙여야 하는가? 이는 괴로워하고 즐기는 몸이 주체를 조금은 평온하게 하기 위함이다. [3] 

[2]     Swimming Ground (Miseon Park), 2020, 73 x 61cm, acrylic on canvas​

작품들의 정제된 배열 속에서 반복되는 것은 무엇인가? 떨어져 나온 주체의 작은 비밀들인지. 혹은 질문하는 타자의 금지를 피하려하는, 숨겨진 “저변에 있는 것”인지.

간단히 말해, 이 침묵의 지점들, 이 모든 억압의 씨앗들이 사후성(L’« après-coup », Lacan) 안에서, 꽃과 식물의 배치를 통해 언급되지 말아야 할 것을 조심스레 은폐하도록 도울 것이다. 실재는 결코 말해질 수 없을 것이다. 승화하려고 시도할 뿐이다. [4].

[3]     Lethargy 2 (Miseon Park), 2020, 65 x 50 cm, acrylic on canvas
[3]     Dogs, 2020, acrylic on canvas, 30×30 cm 
[4]     Sex toy (Miseon Park), 2020, 35 x 30 x 30 cm, printed box

그것을 증명하듯 전시 포스터의 문구 “I long to see your face. (나는 당신의 표정이 궁금해요)”는 마르그리트를 연상케하는 젊은 남자의 대위법으로 쓰였다. 초록빛 표면 위에 부유하듯 누워있는 이 남자는[5] 환각적으로 보이고, 마치 너무 빨리 사춘기에 이른 아이가 강아지 인형 더미 아래에서 잠들었거나 질식한 듯 보인다. “I long to see your face”. 이 말은 향수에 젖어 속삭이는, 어쩌면 흘러가는 시간에 의해 억제된 하나의 부름이 아닐까? 이는 절박하게 재회를 외치는 소원일까, 아니면 이제는 불가능한 욕망, 더 깊숙이 들어가보면, 상실의 견딜 수 없는 상태와 마주했던 것일까?
이는 분명, 도달하지 못한 요구이자 호명이라 할 수 있으며, 또한 기다림이라 할 수 있고 이는 전시 전반에 실마리로써 작동한다. “I long to see your face” 기대에 어긋난 사랑처럼, 타자가 등을 돌렸다는 말일까? 허나 단순히 잠시 부재중인 것이 아니라면? 그는 죽음의 황량한 바닥에 영원히 갇혀 있었을까? 이미지, 사진, 연출된 기억만으로는 선과 형태, 타자에게 수줍게 가려진 얼굴의 섬세함에 생기를 되찾아 주기에 충분치 않다는 것인가?

미지에서 무명으로 De l’insu à l’innommé

튤립 다발에서부터 생의 나무, 이미 봉인된 운명의 동물까지, 모두 은밀히 거절된 존재의 원초적 질문의 유아기적 상징을 띈다. 살아있는 것들의 수수께끼, 성과 죽음, 상징화하고 상상하려는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잡히지 않는 실재.

실제로 이 일련의 회화, 데생 그리고 섬세한 식물(성)의 공간 안에서 무언가에 둘러싸여 조심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구성 속, 어떻게 실재에 구멍을 내는 징후와 흔적들(라깡), 그리고 말하는 주체의 근본적인 미숙함을 찾아내지 않을 수 있을까. (말하는 주체는 성적인 것과의 조우 안에서 항상 붙잡히고 사로잡히고 놀란다)

꽃을 든 소녀와 여성 사이에서 몸의 추방, 여성(féminin)을 향한 닿을 수 없는 여정은 영원할 것이다.

Mauvaise herbe의 퍼포먼스, 2020. 5.

유희적인 해결책으로, 실제적 환기의 역할을 하는 장난스러운 제스쳐가 제시된다. 팀 로고의 공룡 이미지와 슬로건 “Mauvaise Herbe (모베 제흐브 : 잡초(직역하면 나쁜 풀)”가 새겨진 가운은 표준화 되어가는 삶에 잠식당하지 않기 위해 저항하는 짓궂은 초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명의 상징인 야생의 풀들, 누군가는 쉬이 뽑고, 자르는 그것들을 우리는 도리어 찬양해야 하지 않을까? 많은 미물들과 곤충들이 피난처로 삼을 수 있는 곳. 그들의 뿌리가 자양분인 토양을 환기시킬 때. 소진되고 오염시키는 도시의 삶에 반하는 우리의 영혼과 예측 불가능한 생태계가 지닌 가능성들은 늘 존재할 것이다. 물론, 그것이 각 개인들에게 주이상스(jouissance)와 같은 실재와 어떻게 화합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지는 않는다. 허나 (바이러스에 의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 시기에) 자연과의 관계를 생각하고 사회적 유대를 꿈꾸게 하며 또 다른 방식을 보게 하는 태도가 시의 적절하게 느껴진다.

2020년 5월.

장-뤽 가스파르 (Jean-Luc GASPARD) 

정신분석학자, 정신분석학 교수

Email : jeanlucgaspard@gmail.com

​(번역 : 박미선, 이환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