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곳에 숨은 나와 만나기

Emma Park -Solo exhibition <Madness Control – Speaking the unspoken> 2024.11.2-11.23

<매드니스 컨트롤>에 부쳐

이가진

“나는 내 안에 짐승, 천사와 광인을 품고 있다. 나의 관심은 그들의 작용에 관한 것이고, 나의 문제는 그들의 정복과
승리, 몰락과 격변이며, 나의 노력은 그들의 자기표현이다.(I hold a beast, an angel, and a madman in me, and my enquiry is as to their working, and my problem is their subjugation and victory, downthrow and upheaval, and my effort is their self-expression.)”-딜런 토마스(Dylan Thomas)

‘나’라는 존재를 찾는 삶의 여정은 출발을 알리는 신호나 호각 소리도 없이 슬그머니 시작되어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진다.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먼, ‘나’는 삶이 계속되는 한 필연적으로 나 자신의 관건이다. 굳이 ‘실존’이라는 표현에 기대자면, 인간은 스스로가 어떤 존재이며 어떤 존재이고자 하는가를 탐구한다. 이를 위해 현실에서 자기 자신을 창조하면서 각자의 가능성을 전개하려고 한다. 이것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가 주장한 ‘기투(企投, projeter)’, 즉 현재를 초월하여 미래를 향해 나 자신을 내던지는 존재 방식이다. 그러나 인생에서 우리는 종종 무언가에 부딪히고, 가로막히고, 좌절하고, 때로는 멈춘다.

엠마 팍은 페인팅, 3D 오브제, 디지털 페인팅 등 다양한 매체로 작업해 왔다. 장르를 넘어 그의 작품은 신체, 관계를 주요한 테마로 ‘연결’에서 파생되는 장면을 담는다. ‘감정’에 대한 탐구 역시 빼놓고 말할 수 없다. 특히, 무기력, 우울 등의 심리상태를 이미지화하는 작업을 다수 선보였다. 작품과 작가 개인을 연관 지어 해석하는 일에는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지만, 작가이기 이전에 개인으로서 엠마 팍은 자신의 경험을 기꺼이 예술 실천의 재료로 삼는다. 작가가 극도의 무기력을 느끼던 시기에 지난한 감정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심리 전문가의 도움을 받고, 심리학적 행동 패턴과 성격 분류, 자크 라캉(Jacques Lacan)의 정신분석학 이론 등을 학습하며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난 단서를 찾은 경험을 계기로 완성한 ‘무기력’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제대로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채 모로 누운 사람과 주변을 감싼 자연물의 조화가 두드러지는 회화 연작이다. 이러한 작업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욕망과 현대인이 앓는 다양한 심리적 증상의 근본적 원인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다.

종로구 옥인동에 위치한 공간서로에서 2024년 11월 2일부터 23일까지 이어진 프로젝트 <매드니스 컨트롤>을 통해 엠마 팍은 예술적 실험의 폭을 넓혔다. 레이저 컷팅한 나무에 그린 신작 회화뿐 아니라 설치, 퍼포먼스, 참여, 정신분석가의 강연이 어우러진 체험형 전시로 장르적 경계나 틀을 넘어서고자 한 것이다. 나아가 일방향의 감상을 넘은 참여를 유도해 직접적으로 관람자와 관계를 형성하고 그들을 관찰하며 상호작용을 시도했다. <매드니스 컨트롤>은 “도파민 중독에 힘들어하는 어른들을 위한 놀이터 같은 공간”을 지향하며, 이곳에서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져”보라고 권한다. 언제부턴가 널리 쓰이는 ‘도파민’이라는 단어는 뇌신경 세포의 흥분을 전달하는 신경전달물질로 개인의 행동, 감정, 목표, 자아인식 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온 세상이 고통의 자리를 쾌락으로 채우라고 유혹하는 오늘날, 도파민은 헤어나야 할 유독물질 취급을 받는다. 그 결과 우리는 도파민의 지배를 받는 실험용 쥐가 되어 내가 내 운명의 주인이고, 내 영혼의 수장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놀이터’에 빗대긴 했으나 <매드니스 컨트롤>은 샘솟는 충동과 감정을 마구잡이로 분출하는 공간은 아니다. 시간대별로 3인이나 6인 단위로 예약부터 입장, 관람 동선은 물론 퇴장까지 정해진 순서와 안내에 따르되 그 안에서 ‘자율적으로’ 움직임을 결정할 수 있다. 정해진 순서대로 2층부터 지하 1층까지 총 3개 공간에서 펼쳐진 전시는 ‘광기’ 혹은 그와 관련된 어떤 상태, 우리의 삶에 도사리고 있는 우울, 불안, 강박 등을 직간접적으로 다룬다. 정제된 화이트큐브가 아닌 복합문화공간을 선택한 엠마팍은 자신이 설계한 다양한 장치를 가로질러 관객에게 말 걸고, 쉴 곳을 제공하고, 낯선 것을 바라보게 하고, 자신이 관찰하거나 발견한 것들을 그려낸 후 펼쳐 보인다. 이벤트에 가까운 총체적인 경험을 진두지휘하며 자신의 ‘수행(Perform)’과 관객 개개인을 작품 자체의 구성에 통합시킨다. 익숙한 일상의 시공간을 떠나 전시장에 진입하는 순간부터 관객의 다양한 행위 -말하기, 침묵하기, 경청하기, 응시하기, 앉기, 눕기 등-는 무의식이나 내면의 증상을 표면화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고전적인 정신분석은 모든 정상적인 사람이 (가벼운) 신경증자라고 상정하지만, 엠마 팍의 전시는 모두에게 선택의 기회를 열어놓는다. 각자의 선택과 행위가 작가의 설정과 공명하며 복잡다단한 광기의 지도를 함께 그려나가자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전시의 도입부이자 <연극을 위한 페인팅과 관객의 즉흥 배우 되기(Painting for Theater and Audience’s Role as Improvised Actor)>라는 제목의 2층은 연극의 형식을 차용한다. 관객은 배우 혹은 연출가가 되고, 작가가 나무 조각 위에 그린 인물 그림은 누구나 자유롭게 배치할 수 있는 일종의 소품이자 내내 침묵하는 조연 배우 역을 맡는다. 스크린에 송출되는 글자를 통해 작가가 말을 건네긴 하지만, 미리 짜인 대본은 없으므로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의 결과물은 정신 상담에서 활용되는 사이코드라마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또는 라캉의 정신분석에서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자유롭게 이야기하게 하는 언어 치료의 일종인 ‘자유연상’과도 닮아있다. 라캉에 의하면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고, 누군가 당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만으로 치료는 시작된다. 하여 이 독특한 연극의 무대에는 ‘제4의 벽(연극에서 무대와 객석 사이에 존재하는 가상의 벽)’이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에 일반적 의미의 연극에서 보이지 않는 벽을 사이에 두고 서로 간섭할 수 없는 배우와 관객이 있다는 설정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다만 정적 속에서 프로젝터가 작가의 말을 옮긴다. 참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많은 편인지’ 묻거나 책에서 발췌한 내용을 보여주며 낭독해 보라고 권한다. 작가 자신의 경험을 꺼내 놓으며 ‘비명을 질러보라’라거나 무엇이 당신에게 안정감을 주는지, ‘끝내지 못한 말이나 일이 있는지’ 이야기해달라고 요청한다. 물론 그에 대한 응답 여부는 관객의 선택에 달려있다. 눈으로만 읽거나, 텍스트를 무시하고 딴청을 하거나, 큰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든 전부 가능하다. 그리고 그 과정과 발언은 동의를 받고 촬영되어 다음 날부터 1층에 놓인 태블릿에서 재생된다.

2층에서의 시간이 다 되었음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1층 <공동의 관>으로 내려가면 십자가 형태의 의자와 작가가 그린 가짜 성화 앞의 고해성사대가 있는 열린 공간에 입장한다. 잠시나마 말에서 벗어나 해방과 휴식을 누릴 차례다. 외부의 자극을 차단하는 십자가 의자에 몸을 맡긴 채 다과를 즐기거나, 모르는 관객의 연극을 시청하거나, 가만히 앉아 사색에 잠길 수도 있다. 3칸짜리 고해성사대에는 메모지와 필기구, 플라스틱 십자가 목걸이가 놓여있지만 이는 종교적 함의보다는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게 돕는 일종의 보조장치에 불과하다. 다른 공간에 비해 관객이 따라야 하는 지시가 가장 적은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참여형 전시를 설계하며 작가가 정신분석의 방법론을 적극 끌어온만큼 전시 공간을 하나의 독립된 세계라고 가정하고, 관객에게 주어지는 ‘안내’나 ‘개입’은 사람들의 무의식을 표면으로 끌어내는 무형의 대타자(Autre, 법과 언어 등 절대적이고 근본적인 타자)에 비유하면 어떨까. 궁극적으로 우리는 대타자의 미로에서 빠져나와 자신만의 길을 찾음으로써 우리의 광기를 ‘컨트롤’할 수 있다. 이를 예술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작품을 디딤돌로 삼아 미처 몰랐던 세계를 향한 시야를 틔우는 것, 무엇보다 전적으로 그 주체는 ‘나(관객)’이 되어야 한다는 것만이 유의미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시키는 시간이다.

10분의 휴식 후 <매드니스 컨트롤>의 마지막 공간, 지하 1층 <누워서 감상하기(Lying-Down Viewing)>는 문 앞에 놓인 랜턴을 들고 입장한다. 어스름 속에서 3개의 흔들침대와 천장에 매달린 그림 조각이 눈에 들어온다. 마치 요람에 누운 아기가 모빌을 바라보는 것처럼 관객은 움직이는 나무 침대에 누워 주변의 그림을 바라본다. 침대의 옆면에는 허공을 향해 팔다리를 뻗고 있는 인물들이 그려져 있다. 2층에 배치된 나무 조각 그림과 같은 형태의 행잉 페인팅은 버튼을 조작해 위아래로 위치를 바꿔놓을 수도 있다. “일종의 몽상과도 유사한 어떤 방, 진정 정신적인 방”인 이 공간에서는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가 ‘이중의 방’에서 묘사한 장면이 겹쳐 보인다. “순수한 꿈, 분석을 마다하는 인상에 비하면, 규정된 예술, 명징한 예술은 모독이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조화로움의 바탕인 충분한 빛과 그윽한 어둠을 지녔다. 지극히 섬세하게 골라낸 미세한 향기가 아주 가벼운 습기를 머금고 이 공기 속에 떠돌고, 그 안에서 졸고 있는 정신은 온실의 감각에 실려 흔들거린다.”

이윽고 스포트라이트 조명이 아기 천사 그림을 비추면 퇴장 시간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흔들거리던 정신을 다잡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자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열린다. 이제 당신은 다시 세상으로 던져졌다. 30분의 전시가 당신의 진짜 인생을 바꾸어 놓지는 않을 것이다. 예술가는 분석가나 치료사가 아니고, 예술을 치료나 치유의 수단이라고 맹신하지도 말자. 다만 기억하고 있다면, 이 프로젝트의 부제는 ‘말해지지 않는 것을 말하기’였다. 말하고자 하는 것이나 말해지는 것과 ‘다른 것’을 말하기. 누군가에 의해 ‘말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말하기’를 경험함으로써 희미한 각성의 가능성을 더듬어 볼 따름이다. 고유한 존재의 양상, 다양한 삶의 방식을 고민하고 찾기 위해 분투하는 것은 인간이 예술을 통해 오랫동안 다져온 힘이다. <매드니스 컨트롤>을 통해 각자 심연 아래의 무의식을 여행하고 돌아온 이들이 최후에 ‘빛’을 향해 나아가는 장면이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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